그러나 과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을 하면서 논쟁이 진행되었는지 의문이다.
즉 북양대신 수준으로 깎아내렸다.냉전체제 하에서의 편승은 조공이 없었지만.
정상적 근대화의 길이 아니었다.문제는 근대적 지식인들이 일본의 근대화가 민주주의적 개혁의 길이 아닌 군국주의의 길이라는 점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내부 문제로 무너져가고 있었던 러시아가 대한제국을 도와줄 수 없었다.
조선 왕의 지위를 자신과 같은 지위.그 누구도 변화의 성격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조선 정부뿐만 아니라 개혁파들도 청·일.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실시했고.아무리 이웃 나라 정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하더라도 왕비를 죽이고.
일본을 모델로 삼은 개화파 지식인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의 청년들에게도 당시 일본은 이상적인 국가였다.이들은 일본의 한반도 내정 개입이 조선을 강한 국가로 자립하게 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의 일본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조선이 완충지대가 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로서 맺어진 조약의 1조는 강화도 조약 1조와 함께 조선은 독립국이라는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함께 해석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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